게임을 만들고 싶었던 소년

2023-03-02 23:46:19
Won Reeh

한달 전 쯤에 본가에 들렀을 때 였다. 지금은 아버지가 쓰고 계시는 내 책상 구석에서 연습장 몇 권을 들춰보다가 옛 추억에 잠기게 되었다.

나는 늘 무엇인가를 보거나 체험하고나면 그것을 한번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 였는데,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것도 좋아 했지만 끝까지 클리어하는 것만이 목적이라기 보다는 어느정도 즐기고 나면, '이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생각하면서 나도 비슷한 것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곤 했다.

당시 어린 마음으로는 생각하기에 어느정도 프로그래밍에는 자신이 붙었지만.. 아무래도 게임을 만드는게 가장 큰 걸림돌은 그래픽이었다.

PC통신의 유명한 분들처럼 나도 그림 잘그리고 도트 잘찍는 달인과 함께 팀을 이루어 게임을 개발해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고, 나 스스로 해결하고자 그림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물론 실력이 잘 늘지 않었다. 게다가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게임제작을 위한 도트노가다는 또 다른 영역이었다.

과거의 연습장

그러다가 생각의 전환이 온 시점이 있었는데, 바로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MUD게임이었다. 당시 여러 MUD게임이 유행이었는데, 그 중에서 나는 '단군의 땅'이라는 MUD게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동,서,남,북을 타이핑하면서, 화면에 뿌려지는 텍스트 묘사가 마치 머리속에 이미지로 렌더링 되는 듯한 놀라운 현상을 경험하면서 정말 재미있게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큰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것은 바로 전화비가 20만원이 넘게 나온것이었다. 나는 부모님께 크게 야단을 맞게 되었다.

전화 모뎀을 통해 플레이하는 방식이라 플레이한 시간만큼 전화요금에 추가 되는 과금 시스템이었고, 지금도 20만원이 작은돈이 아닌데 1990년대 물가로 계산해보면 당연히 혼날만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MUD게임을 더이상 못하게 되었다. 나는 금단현상을 느끼게 되었고, 싱글플레이가 가능한 OUD/SUD 게임을 PC통신에서 다운로드 해서 플레이하며 위안을 삼으려고 했었다. 멋진 작품들이 여럿 있었지만, '단군의 땅'과 비슷한 감성을 주는 게임은 못 찾았다.

OUD란?

당시 나우누리 'OUD 속의 세상' 이라는 소모임을 개설하신 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OUD는 One User Dungeon 의 약자로 MUD(Multi User Dungeon)와 대비되는 용어인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SUD(Single User Dungeon)가 올바른 표현인데 이미 OUD로 명명 해버린 점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하셨었다.

그래서 나는 직접 만들기로 결심을 하였다. 핵심은 그래픽이 필요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혼자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천상천하' 라는 제목의 OUD게임이었다. 깊은 고심 없이 갑자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문구가 떠올라서 붙인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단군의 땅'과 유사하게 주막, 포도청 등의 한국적 정서를 반영한 맵(존) 구성이나 '단군의 땅'과 유사한 명령어 체계로 시작을 하였는데 점점 만들다보니 무협요소가 애매하게 섞이면서 이도저도 아닌 설정이 되었다.

천상천하 스크린샷 by DOSBox

본인도 원본 소스와 파일들을 유실 했었는데 머드클럽 자료실의 어느 멋진분께서 자신이 소장중이던 자료를 공유해주셔셔 이 실행파일을 구할 수 있었다.

기억 속의 제작 과정을 떠올려 보면, 일단 머리 속에 생각나는 대로 무작정 코딩을 시작했다. 그러다가는 모눈종이에 연필로 맵을 그리고, 몹의 위치를 지정하고, 장비를 장착할 위치별로 숫자로 부여하였다. 맵에디터, 아이템에디터 이런거 없이 종이에 작성한 내용을 기반으로 수작업으로 데이터파일을 직접 만들었다.

천상천하 아이템 장착 위치 구상도

지금의 나와 사뭇 다른 점은 지금은 뭔가 하나 만들려면 구글링을 엄청나게 하면서 과연 이게 올바른 방식인지, Best Practice는 과연 무엇인지, 세상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정말으니 더 찾아봐야겠 하면서, 검색만 하다가 정작 코딩은 진도가 안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어린시절의 나는 거침이 없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타이핑해나가는 것이었다. 올바른 구현 방식인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일단 실행해서 돌아가면 된다. 학교에 가서도 수업시간에 나의 머리 속에서는 개발 진행 과정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코딩을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그 때의 나는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나우누리 'OUD속의 세상' 에서 활동하며 몇차례 업데이트도 진행했었고, 베타테스터 분 중에서 한분이 맵(존) 제작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셔서, 부랴부랴 조악한 인터페이스의 맵에디터를 만들어서 협업도 진행하고 즐거웠었다.

시간히 흐를수록 아무래도 너무 무작정 만들어서 그런지 한글입력 버그라던지 화면스크롤이 버벅인다거나 전반적인 시스템이 엉망이라고 느껴졌다. 라이브러리 선정에 대한 문제와 구조적 설계에 대해 어떠한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전체적으로 싹 뒤엎고 싶어졌다.

그리고는 새롭게 '영웅천하' 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발을 시작했다. 과거 '천상천하' 의 구조적 버그 등을 해결하고, 맵, 몹,아이템 에디터 등도 만들었는데.. 정작 맵이나 아이템을 만들기 귀찮아 지고 아이디어가 고갈되며 점점 개발의욕이 저하되어 중단하게 되었다. 온라인에 공개되지 않은 채 하드디스크 속에만 남아 있다가 현재는 유실되어 버렸다.

사실상 껍데기만 만들고 알맹이가 없는 셈인데 아마도 지금 생각해보면 창의적인 컨텐츠 생산에 대한 어려움을 느낀게 아닌가 한다.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그래밍도 그래픽도 아닌 바로 컨텐츠 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 때의 나는 꿈과 열정이 있었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씩 옛 생각을 하다보면 나우누리 'OUD속의 세상' 에서 활동하던 시절이 그립다.

언젠가 여유 시간이 생긴다면 웹이나 모바일버전으로 한번 리메이크 해보고 싶어진다. (아무도 관심있는 사람이 없겠지만...)